소주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참이슬’ 또는 ‘처음처럼’이다. 참이슬은 진짜 이슬이라는 뜻의 ‘진로(眞露)’에서 유래되었으며, 현재 서울 경기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하이트진로의 주력 상품이다. 처음처럼은 강원 지역의 경월소주를 인수한 두산주류 BG에서 2006년 출시한 제품으로 현재는 롯데주류의 대표적인 소주 브랜드이다.
이외에도 국내 소주 생산업체는 지역적 기반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대구·경북의 금복주(참소주), 부산의 대선주조(시원), 경남의 무학(화이트), 전북의 보배(하이트소주), 광주·전남의 보해양조(잎새주), 대전·충남의 선양(O2린), 충북의 충북소주(시원한 청풍) 그리고 제주도의 한라산(한라산)이 있다.
소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즐겨 마시는 술중의 하나로, 특히 70~80년대 급속한 공업사회로의 변화를 거치면서 소주는 도시 근로자들의 애환과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알코올 음료로서 근대 한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술이 되었다.
일본의 술 관련 책에서도 일본 소주의 유래는 조선반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주의 종주국은 역시 한국이다. 하지만 현재 대량으로 팔리고 있는 소주는 옛날의 소주와는 사뭇 다르다. 옛날방식의 소주는 안동소주나 감홍로, 진도홍주, 이강주, 죽력고와 같은 것들이다.
이들 소주는 술덧을 발효한 다음 단식으로 한번 또는 두 번 증류를 하여 약 30~45도의 소주를 만드는 증류식 소주이다.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은 발효한 술덧을 다단식 증류기를 통하여 알코올 농도 95%까지 증류한 다음 물로 희석시켜 만든 희석식 소주이다.
소주에 있어서 잘못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희석식소주가 석유에서 뽑아낸 화학주라는 것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소주는 쌀이나 고구마, 타피오카, 보리 등의 전분이 많은 원료를 이용하여 누룩과 효모에 의한 발효를 거쳐 발효주를 만들고, 이것을 증류하여 소주를 만든다.
석유에서 뽑은 알코올은 식용으로 전면 금지되어 있다. 법적으로 소주로 만들수가 없다. 우리의 희석식소주는 러시아의 보드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재료나 기술적인 면에서도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주는 그냥 마실 수 있게 맛있게 만들었는데 반해 보드카는 별 맛이 없다. 그래서 주로 칵테일에 활용된다.
국내 소주생산업체의 불타는 경쟁으로 우리의 소주 제조기술은 고도로 높아졌으며, 많은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소주를 만들어 마셨는가? 그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직도 그 흔적이 소주의 옛말에 남아 있는데,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에서는 소주를 ‘아랭이’, ‘아래기’, ‘아래이’, ‘아랑주’라 한다. 이 모두 몽골말 ‘아라키’에서 비롯 되었다.
징기스칸의 서역 원정 때 페르시아 증류주인 알렉, 아랍의 아라크, 터키의 라크가 몽고에 도입돼 아라키가 되었고, 이 말은 영어로 주정을 뜻하는 알코올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소주는 페르시아에서 몽고를 거쳐 고려로 유입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당시 몽골인들이 마시던 술은 ‘마유주(馬乳酒, 말젖술)’였다. 몽골말로 ‘아이락’이라 부르는 술인데 말젖술 이나 양젖술을 끓여서 알코올을 받아 만든 증류주다.
원래 증류주(소주)는 기원전 3천년 경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지방에 살던 수메르인들에 의해 개발 되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즉 아랍의 연금술사들은 금을 합성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되고, 그 결과의 하나로 인간에게 증류주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곡물이나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탁한 술을 다시 끓여서 맑고 독한 향기로운 액체를 만든 것이다. 이 시기 증류주는 의료용이나 향수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류기술로 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증류주는 연금술사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명약이 되었으리라!
소주 하면 예로부터 개성소주와 안동소주를 꼽았다. 온 세계를 휩쓸었던 몽고군이 우리나라를 발판으로하여 일본으로 쳐들어가려 했을 때 전초 기지로 삼은 곳이 안동과 개성이었다.
몽고병들은 추위를 막고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자극제로서 아락주를 가죽 술병에 담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수시로 마셨고, 이 외인부대에 아락주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국 소주의 뿌리라고 한다면 좀 슬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에 반대하는 무신정권의 배중손과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서 몽골군과 오랫동안 대치하였지만 결국 고려와 몽골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었다. 이때 다시 삼별초는 제주로 향하고 그곳에서 3년간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1273년 5월, 160척의 전함을 타고 온 1만 명의 여몽연합군은 김통정의 최후 항전을 제압하면서 삼별초 항쟁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 뒤 제주는 몽골의 직할지가 되고, 몽골의 조랑말(몽고어 조로몰) 방목장을 세우게 되면서 많은 몽고인들이 따뜻한 제주에서 살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진도와 제주도에 증류주인 진도홍주와 고소리술이 유명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마시는 용도의 증류주 역사는 900년 정도 된다. 12세기 몽골의 아라키가 만들어지고 13세기 중반 고려의 아랑주(소주)가 만들어 짐으로써 한국의 소주는 세계적으로도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로주(露酒, 현재의 백주)가 개발된 시기도 약 13세기로 볼 수 있으며, 뒤이어 14세기에는 태국의 라오론(쌀소주)이, 15세기에는 일본 오끼나와의 아와모리가 생산되었다.
서양에 있어서 러시아의 보드카는 13세기에, 위스키는 15세기 아일랜드에서, 브랜디(꼬냑)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적으로 증류주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마다 특색 있는 맛을 내는 소주가 많았는데, 회를 안주 삼아 따끈한 밥주발 뚜껑으로 마셔야 제맛이 난다는 ‘안동소주’, 황해도 선비들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선비 아낙들이 빚어 팔기 시작했다는 ‘공덕리 소주’, 배와 생강즙을 곁들인 전주의 ‘이강고’, 대나무의 죽력으로 만든 ‘죽력고’,
관서지방 명주인 ‘감홍로’, 귀양 선비의 한을 풀어 주었다는 ‘진도홍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소주를 대통 속에 묵혀 두었던 ‘죽통로’, 살아 있는 소나무 밑동을 파고 그 속에서 묵혔던 ‘와송로’ 등 개성 있는 소주가 많았다. 이처럼 조선시대 소주는 다양한 제조방법을 통하여 소주마니아 선비들의 혀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고려나 조선시대 때에는 고급주로 일부 특권층만이 마시던 소주가 근대에 이르러 대중화되었다. 1905년 전에는 주로 서울 공덕동, 마포, 동막 부근에서 가내 공업 형태로 제조돼 서민들에게도 팔았다. 1910년 이후 소주 제조법은 크게 변했는데, 재래식 시루가 주조용 시루로 바뀌고, 처음으로 소주 받이에 냉각 사관을 부착하였다.
소주 제조업체도 1916년 이전에는 소규모 가내공업 업체가 전국적으로 2만8천4백4개에 달했으나, 이후 업체들이 기업의 형태를 갖추면서 업체 수는 줄었으나 생산량은 오히려 늘었다. 기술의 진보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1926년에는 전국 1,303개 양조장에서 무려 23만 7천1백24섬의 양곡이 소주 생산에 소비되었다.
1924년 (주)진로의 전신인 진천양조상회 설립은 소주가 우리 국민과 더욱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양조업체가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소주는 국민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서민의 술’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불어 닥친 식량난으로 쌀을 원료로 한 양조가 금지됨으로써 소주 생산도 크게 위축되었다.
1961년 소주를 증류식과 희석식으로 구분하는 주세법이 만들어졌고 ’64년에는 증류식 소주 제조에 곡물을 사용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다. ’65년 1월부터는 양곡을 원료로 사용하는 주류 제조를 금지는 것을 골자로 한 양곡 관리법이 실시돼 모든 소주 생산업체는 증류식 제조를 중단하고 희석식으로 대체했다.
양곡 관리법에 따라 증류식 소주업체는 모두 문을 닫았는데, 이 모든 조치는 보릿고개와 같이 당시의 어려운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70년대에는 소주업체 난립에 따른 과다경쟁으로 유통 질서가 문란해지자 정부는 판매를 전국적으로 통합하는 공동 판매제를 실시했다.
’73년 국세청은 제조업체 통폐합을 단행, 1도 1사 원칙을 세웠다. ’73년도에 68개였던 소주 제조업체는 매년 줄어 10개 업체로 축소되었다. 그러다 ’98년 소주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서 업체 간 경쟁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때 사라졌던 증류식 소주가 등장하였으며, 안동소주 등 알코올 농도가 높은 증류식 소주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위스키 수입은 전체 주류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품질이 우수한 증류식 소주가 출시되고 있으며, 병이나 라벨 디자인도 세련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재료에 있어서도 쌀 이외에 보리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의 몸속에는 오래전부터 마셔온 소주의 기운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 한국의 술, 소주가 한국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소주를 마시되 소주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향기롭고 감미로운 이슬, 소주를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인생의 또 하나의 행복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