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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우리 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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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금주령

사람이 살아가는데 밥은 필수품 이지만 술은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따라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치이다. 특히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흉년과 기근이 드는 해는 으레 술을 만들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금주령이다. 하지만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은 언제나 우리 생활 속 깊숙이 자리 박혀 있었다. 왜냐하면, 술속에는 사회, 역사, 경제, 문화가 뿌리 깊게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금주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사회분위기와 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금주령은 단순히 술을 못 마시게 한 단순 법적금지가 아니라 시대가 빚어낸 역사적 산물이다.

금주령을 발동시킨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식량의 낭비를 막는 것이었다. 술은 사람들의 주식인 곡물로 만든다. 물론 과일로 만드는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주로 곡물로 술을 빚어왔다. 곡물로 술을 빚음으로써 양식으로 써야할 곡물이 술로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경제가 전적으로 농업위주였고 백성이 먹어야 할 곡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먹어야 할 식량이 부족한 때 식량의 낭비를 방지하기 위한 금주령은 너무나도 당연한 정치적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최근까지도 이어져왔다.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60년에서 70년대 말까지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매년 찾아오는 보릿고개로 쌀이 모자랐고 정부에서는 막걸리 양조에 쌀을 못 쓰게 했던 것이다.

쌀 막걸리가 다시 시중에 등장한 것은 쌀이 자급자족되고 2년 뒤인 1977년 12월이나 되어서였다. 흉년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이라던지 국상 등이 있으면 금주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즉 흉년, 천재지변, 국상 등은 언제나 있을수 있는 일이었고 금주령 또한 조선이 개국되면서부터 줄곧 있어왔던 기본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 금주령의 예외 규정

조선시대실록에는 다양한 금주령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금주령에서 예외 되는 규정을 찾을 수 있다. 태종 10년 기록에,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매매하는 것도 모두 엄하게 금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즉 술을 약으로 이용하거나 생업을 위한 행위에 대해서는 엄하게 금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태종 12년에는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였다. ‘금주령을 먼저 세민(細民)에게 행하고, 거가(巨家)에는 행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팔아서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 자도 있으니, 공사연(公私宴)의 음주 이외는 금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있다. 즉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금주령의 대상은 세민(細民)으로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이 그 대상이었고 지체 높은 문벌 귀족인 거가(巨家)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술을 팔아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예외를 인정하였다. 또한 태종 15년 실록에 의하면, 공사의 연음(宴飮)을 금지하였다. 환영과 전송에 백성들이 탁주를 마시는 것과 술을 팔아서 생활하는 자는 금례(禁例)에 두지 말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여기서도 공사의 연음을 금지함으로써 금주령을 내렸지만, 환영이나 환송회에서의 음주와 생계를 위한 양조는 허가하였다는 뜻이다. 아무리 엄한 법이지만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예외를 두어, 백성의 생활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주령
<금주령>

♣ 금주령! 유전무죄 무전유죄

금주령은 임금의 의지나 정책 담당자의 성격 또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세종실록 2년의 이야기를 보면, ‘청주(淸酒)’를 마신 자는 걸려들지 않고, ‘탁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어 처벌을 받는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금주령은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려드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세종실록 11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가난뱅이는 정말 우연히 탁주 한 모금을 마시다 체포되고, 세력과 돈이 있는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막걸리를 마신 사람은 처벌을 받고, 비싼 양주를 마신 사람은 걸려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금주령 기간에 술을 마시면 무조건 걸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늙고 병든 사람의 복약(服藥), 또 이런 경우에 필요한 술을 매매한 사람은 처벌에서 제외되었고, 오로지 놀기 위하여 마시는 경우, 부모 형제가 아닌 사람을 영접 전송하면서 마시는 것, 또 이들에 게 술을 판 경우는 모두 처벌 대상이 되었다.

♣ 가장 가혹한 금주령, ‘영조시대’

영조의 금주령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한 이가 있을 정도였다. 영조 38년 대사헌 남태회가 남병사 윤구연을 고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자신이 수신(帥臣)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금주령을 범하고 술을 빚어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변방 장수의 중요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이 말을 들은 영조는 즉시 윤구연을 잡아오게 하고 숭례문 앞에 나아가 윤구연의 목을 직접 칼로 쳤다.

이 때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모두가 상소문을 올려 윤구연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으나, 영조는 세 정승을 파직했다. 그리고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의 신하들도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도리어 이들까지 벼슬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영조는 술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하게 대했으며 영조 즉위 내내 금주령은 지속되었다. 조선의 문물을 꽃피운 임금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과해서일까 곡식을 축내는 술에 대해서는 이토록 엄하게 대하셨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제사에도 술 대신 단술을 쓰게 하였다고 한다.

♣ 쌀 먹는 하마 소주와 신고식

금주령에서 특히 문제 삼았던 것은 소주였다. 소주는 막걸리나 약주를 빚은 다음 증류하여 만드는 알코올 도수가 매우 높은 술이다. 따라서 소주의 양은 적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원료인 쌀이나 곡식은 매우 많다. 조선 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소주의 소비가 늘어났고 이에 대한 폐해도 늘어났던 것이다.

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의 기록에 의하면, “내가 처음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소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소주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소주가 많이 유행하였던 것은 ‘신래침학(新來侵虐)’ 이라는 관습이 일조를 했다고 추측된다.

신래침학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처음으로 선배를 만나는 자리에서 ‘신고식’이라 하여 우동 그릇이나 냉면사발에 술을 마시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신래침학은 과거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관청에 보직을 받아 출근하는 신입사원에게 고참들이 술과 요리를 요구하는 일종의 입사의식(入社儀式)이다.

이 때 신참은 고참들에게 값비싼 소주를 바쳐야 했다. 중종실록에서 남곤은 “민간의 곡식이 부족한 것은 술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소주를 만들기 위해 미곡을 낭비하는 것이 가장 심하며, 소주는 특히 신래를 침학할 때 반드시 요구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렵게 과거에 급제한 기고만장한 신입사원에 대하여 기를 한 꺼풀 꺾어 선배들에게 예의와 겸손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적당하면 좋은 미풍양속이 될 수 있으나 너무 과하면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는 악습이 되는 것이다.

3월이면 대학가에서 의례 대면식이니 신고식이니 하여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가끔 신입생이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다. 즐거운 자리에서 마신 술이 독이 되지 않으려면 술자리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배려와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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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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