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日長山色碧嵯峨)/ 천하에 떨친 바른 기상은 여전히 드높아라(鍾得乾坤正氣多)/ 북으로 떠난 이나 남으로 내려간 이나 의로움은 매한가지(北去南來同一義)/ 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精金堅石不曾磨).
동계 정온 선생의 충절을 기리며 정조대왕께서 친히 내리신 시다. 동계 선생은 광해군의 폐정에 목숨을 걸고 직언을 올렸던 충신이다. 그의 절의 못지않게 500여 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켜온 종택이 넉넉한 기품으로 사람을 반긴다.
동계 선생은 비록 42세 늦은 나이에 과거를 치렀으나, 그 사이 내암 정인홍, 오리 이원익, 갈천 임훈, 한강 정구, 월천 조목 등의 선비를 만나 학문을 익혔다. 임진왜란 때는 부친 정유명 선생을 따라 의병장 김면 막하에서 종군했다. 선생의 걸음이 한양과 거창, 전장을 누볐으니, 그를 찾는 이 또한 부지기수. 그 손님맞이 몫은 오롯이 종부의 것이었다.
♣ 귀한 손님맞이상과 다과상
동계 정온 선생 종가의 손님맞이 상차림이다. 돔장, 우엉·버섯전, 콩나물찜, 닭다리구이, 약산적, 고추소찜, 전복구이, 족편, 집장, 김치, 수란채국, 북어보푸라기와 약고추장으로 차렸다. 식사와 함께 간단한 다과상도 빼놓을 수 없다. 잣을 띄운 오미자차에 호두를 박은 곶감과 잣, 육포를 곁들여 올린다. 동계 가문의 육포 맛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 며칠 걸려 만드는 족편부터 싱싱한 고추소찜, 콩나물찜까지 기품 담긴 손님맞이상
사돈댁 같은 어려운 손님이 오면 상차림에도 더욱 신경이 쓰였다. 평소 먹지 않던 귀한 음식을 올리고, 반찬 가짓수도 늘려 손님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상 위에 오르면 단순해 보이는 음식이라도 어느 것 하나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없었다.
며칠이 걸려야 완성되는 집장이나 족편 같은 음식부터, 금세 익혀야 아삭함을 잃지 않는 고추소찜, 콩나물찜에 이르기까지 상 위를 수놓은 기품만큼이나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다. 돔장은 현 종부의 돌아가신 시할아버님께서 특히 즐기던 음식이다. 뚝배기에 도미대가리를 넣어 돔장을 바글바글 끓여 들여가면 밥그릇을 금세 비우곤 하셨다.
▪ 돔장
나박하게 썰어 놓은 무 위에 손질한 돔을 얹고, 간장, 고춧가루, 설탕, 다진마늘 등으로 양념장을 만들어 끼얹는다. 물을 반쯤 잠기게 부어서 자박하게 조린다. 돔장을 끓일 때 메주콩을 한 줌 정도 바닥에 넣고 끓여야 들러붙지 않고, 돔 뼈가 잘 무른다.
▪ 수란채국
팔팔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달걀을 깨뜨려 넣어 반숙을 만든다. 만든 반숙은 찬물에 헹궈 차게 식혀 둔다. 고깔을 뗀 잣에 식초와 소금을 넣고 갈아 물을 부어 잣국물을 만들어 놓는다. 쑥갓은 녹말가루를 입혀 살짝 데쳐놓고, 석이버섯을 불려 채 썰어 놓는다. 미나리도 살짝 데쳐 놓고, 삶은 문어는 편으로 썰어 놓는다. 그릇에 수란, 문어, 미나리, 석이버섯, 쑥갓, 실고추 등을 고명으로 얹고 잣국물을 붓는다.
▪ 콩나물찜
머리와 꼬리를 뗀 콩나물은 아삭하게 데쳐놓는다. 고사리, 미나리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놓고, 당근, 다시마, 버섯, 쇠고기는 같은 크기로 채 썬다. 미더덕을 볶다가 준비된 재료를 넣어 함께 볶는다.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찹쌀풀을 넣어 걸죽하게 만든다.
▪ 닭다리구이
닭다리는 껍질을 벗기고 잔 칼집을 넣는다. 간장, 마늘, 맛내기 국물, 후추로 양념장을 만들어 반나절 정도 재워둔다. 타지 않도록 돌려가며 센 불에 구워 잣가루 고명을 얹어낸다.
▪ 약산적
다진 쇠고기를 반대기 지어서 구운 다음 불고기 양념간장에 조린다. 한입 크기로 썰어 놓고 양념간장을 촉촉하게 끼얹고 잣을 고명으로 얹는다.
▪ 고추소찜
풋고추를 씻어 꼭지를 따지 말고 한쪽을 갈라 씨를 뺀다. 고추에 녹말가루를 살짝 뿌리고 양념해 볶은 다진 쇠고기를 소로 채운다. 위에 녹말가루를 살짝 뿌려서 풀기만 가시도록 쪄낸다. 고추는 생으로도 먹는 것이므로 푹 익히지 않는다. 멸치, 양파, 북어대가리를 끓여 만든 맛내기 국물에 간장, 마늘, 식초를 넣어 양념을 만든다. 상에 내기 바로 전에 양념을 끼얹는다.
▪ 전복구이
중간 크기의 전복을 준비해 껍질에서 살을 떼어 낸 다음 소금물로 씻어 열 십자로 칼집을 낸다. 간장, 마늘, 참기름, 파, 실고추, 설탕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양념장에 전복을 30분정도 재워둔다. 전복껍질에 전복을 담아 석쇠 위에서 굽는다. 다 구어지면 먹기 좋게 썰어서 전복껍질에 다시 담아낸다.
▪ 족편
소족만 고아서 편을 만들면 별 맛이 없다. 그래서 껍데기와 기름기를 제거한 닭으로 육수를 내어서 족을 고아서 족편을 만든다.
▪ 집장
콩과 밀을 2대1 비율로 삶아서 청국장 만들 때처럼 사흘정도 띄워서 말린다. 말린 것을 가루 내어 놓는다. 가지, 박, 부추, 고추, 토란대를 간해서 숨을 죽인 후 건져서 물기를 빼놓는다. 준비된 집장용 가루와 찹쌀밥에 건져놓은 재료를 넣고 섞어 전기밥통(예전에는 등겨로 불을 피워 묻어두었다)에 사흘정도 삭힌다. 다 삭으면 맛내기 국물로 간을 조절해서 폭폭 끓여낸다. 겨울에는 배추나 무를 넣기도 한다.
♣ ‘없는 이들 멸시말고, 없는 일가 보살피라’ 경주 최부잣집 맏딸 최희 종부
동계 선생의 14대 종부 최희(86세) 할머니는 경주 최부잣집 맏딸로 태어났다. 열세 살에 정혼하고 3년 만에 신행을 온 것이 어느덧 70년이 훌쩍 지났다. 혼례 전 친정할머니께서는 최부잣집 집안의 딸들을 불러앉히고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가진 게 좀 있다고 없는 이들을 멸시하지 말고, 없는 일가들을 보살피라고 가르치셨다. 친정이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부잣집이었던 만큼 음식도 호사스러웠다. 그러니 아무래도 음식솜씨는 친정어머니께 내림받은 게 대부분이다.
손님이 아무리 많이 와도 닭을 그냥 삶아내는 법이 없었다. 닭다리 하나하나 잔 칼집을 내고 양념을 발라 굽는 닭다리 구이는, 친정 솜씨를 물려받은 것이다. 그 솜씨를 받은 최희 할머니는 동계 선생 댁으로, 동생 최소희 할머니는 서애 선생 댁에 종부로 혼례를 치렀다.
거창은 깊은 내륙에 자리해 생물 생선을 구하기 어려웠다.“ 진주에 사시던 시숙모님이 오실 때나 싱싱한 생선을 구경할까.”간을 한 고등어 정도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닷물고기였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어르신들이 기침하시면 대추죽이나 잣죽으로 조반을 올렸다고 한다.
10시쯤 아침을 차리고, 1시에서 2시 사이에 점심, 일곱 시가 되면 저녁을 지어 올렸다. 종종거리며 음식준비를 하다보면 하루해가 짧았다.
동계 선생의 15대 종손 정완수(69세) 선생과 함께 종택을 지키고 있는 류성규 차종부의 손맛도 빼어나다. 차종부는 퇴계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안동 명문 전주 류씨 정재 류치명 선생 집안에서 시집왔다. 시댁과 친정 양가의 내림손맛을 이어, 장류부터 육포, 갖은 장아찌를 상품화 했다.
♣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붉은 현판이 손님을 맞는 종택
동계 정온 선생은 조선 시대 선조·광해군·인조 때의 학자로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서 죽이고 그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자 이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0여 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했다. 또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음에도 인조 임금이 항복하자 목숨을 버리려 했던 충신이다. 이때 할복자살에 실패한 동계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고향집에 머물지 않고 덕유산 자락으로 들어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으며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정조 임금은 선생의 충절을 기려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동계 선생의 종택이 있는 경남 거창은 산과 계곡의 자연경관이 뛰어나 아담한 정자들이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거창으로 발령 나면 울고 왔다 울고 갔다고 한다.
올 때는 워낙 오지라 오기 싫어서 울고, 떠날 때는 산수가 좋아 떠나기 싫어 울었다고 한다. 너른 뜰을 품은 동계 정온 선생의 고택은 약 200여 년 전 중건한 것으로 약 500여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다.
‘문간공동계정온지문’이라 쓰인 붉은 현판이 달린 솟을대문을 지나면 기품있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누마루는 눈썹지붕이 있어, 사랑채의 당당함을 더욱 뽐낸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충신당’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