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샤또 무똥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 와인과 예술의 접목
[표 13] 샤또 무똥 로칠드의 테크니컬 노트
[표 14] 샤또 무똥 로칠드의 역사
1973년은 1881년에 태어난 피카소가 92세의 나이로 사망한 해이기도 하고 샤또 무똥로칠드에게 그리고 프랑스 1855년 와인 등급사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특별한 한해이기도 했다.
샤또 무똥 로칠드에게는 1855년 2등급으로 분류되어 상처받았던 자존심을 찾아은 해이기도 했고 1855년 프랑스 와인 등급사에서는 등급 제정 이후 118년 만에 첫 예의 규정을 승인한 한해이기도 했던 것이다.
1855년 메독 와인 등급 역사에서 단 한 번의 예의를 만들어 주었던 와인이 이 와인이다. 1855년 등급 제정 당시 2등급으로 책정되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와인.
이 와인은 이 등급 제정 이후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결국 1855년 등급에 단 하나의 예외를 만들게 되었다. 1973년 피카소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면서 샤또 무똥은 자존심을 되찾는 해이기도 했다.
“premier ne puis,second ne daigne Mouton suis / premier je suis, second je fus, Mouton ne change. (1 등급이 될수 없다면 2등급을 거부한다. / 1등급에 오른 이제 2등급은 옛말, 무똥은 영원할 것이다.”
1924년 샤또 무똥 로칠드의 소유권을 받은 바론 필립드 로칠드가 한 유명한 이야기이다. 샤또 라피트와 친척 관계에 있었고 샤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그가 1855년 메독 등급 분류에서 1등급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2등급으로 분류되었을 때의 심정과 1등급으로 1973년 승격했을 때의 마음을 나타낸 말이다.
보브도의 유명한 양대 샤또의 메독 5등급 분류와 함께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무똥 로칠드의 역사는 1853년 바론 나타니엘 드 로칠드(Baron Nathaniel de Rothschild)가 경매에서 샤또 브랑 무똥(Brane-Mouton)을 금융 사업을 하고 있던 그의 고객에게 서비스할 목적으로 구매한 것에서부터 출발 한다.
그는 와이너리를 구입하여 이름을 샤또 무똥 로칠드(Chatteau Muton Rothschild)로 고치고 1924년에는 바론 나타니 엘 드 로칠드의 증손자가 되는 바론 필립 드 로칠드(Baron Philippe de Rothschild)가 모든 와인은 병에 넣어서 운반하게 하였다.(mis en bouteille au Chateau)
당시에는 샤또에서는 와인은 오크통에 담아 도매상에 판매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도매상이나 식당에서 와인을 병에 담곤 했다. 담는 곳이나 과정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와인에 대해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었다.
필립 남작이 이러한 불신을 타개하기 위하여 최초로 모든 와인을 샤또에서 병입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로선 하나의 혁명적인 일이었고 고급 와인을 만들고 그 품질을 이어 나간다는 자부심은 직접 완제품을 시장에 내어놓음으로 해서 지켜질 수 있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정 칼루(Jean Carlu)에게 병의 라벨을 디자인하게 요청한다. 이것은 와인 역사상 최초로 샤또 병입 즉,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병입을 최초로 시도했고 그래서 소비자들에게 독특하게 각인시킬 병의 라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와인을 병에 담아 운반하게 하려면 더욱 많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1926년에는 건측가 찰스 시클리(Charles Siclis)에게 술 창고를 설계하게 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무똥 카데(Mouton Cadet)를 출시했다.
1945년에는 세계 제2차 세게 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필립 즐리앙(Philippe julian)에게 전쟁 기간 중 윈스턴 처칠에 의해 유명해진 V자를 그래픽화하여 라벨에 넣게 했다.
이 작가는 보르도 출신으로 미술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동시에 일러스트 작가였다. 그 이후 라벨에 매년 예술가들의 작품을 게제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전통이 되었다. 2013년에는 한국 화가 이우환의 작품을 라벨로 하기로 하고 이우환 화백의 소개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2013 빈티지 삽화의 일은 1936년 한국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예술가 그리고 철학자인 이우환에게 맡겨겼다. 자연적인 소재와 단순함은 집중과 어울림 그리고 억제의 예술에 의한 명상에 의해 최면의 효과를 가져 은다. 샤또 무똥을 위한 작품에서 자주 빛 색은 처음에는 희미했다가 발효통에서 조심스럽게 만들어지는 명성 있는 와인처럼 점점 풍성해진다.”
그리고 1962년에는 와인 예술 박물관(Museum of Art in Wine)을 만들었다. 1973년에는 당시 농림부 장관이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쟈크 시락(Jacques Chirac)에 의해 1855년 메독 등급 분류에서 2등급으로 분류된 지 118년 만에 메독 1등급으로 다시 승격이 된다.
1981년에는 바론 필립에 의해 샤또 무똥의 라벨전시회를 열고 1991년에는 새롭게 에일 다르쟝(Aile d’ Argent)를 출시하고 1993년에는 Second Wined 르쁘띠 무똥(Le Petit Mouton)을 출시한다.
2006년에는 버버리 힐즈(Beverly Hills)의 크리스티에(Christie’ s)경매에서 1945 빈티지가 290,000달러로 괄리고 매그넘(Magnum) 사이즈 6병이 345,000달러에 팔려 샤또 무똥은 가장 비싼 와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88년 바론 필립이 사망했다. 1924년부터 샤또 무똥을 이끌어오고 무똥을 개혁하고 그 명성을 세계에 알렸던 사람이다. 그의 딸 바로네스 필리핀(Baroness Philippine)은 스위스 화가 한스 엔리(Hans Erni)가 그린 1987년 라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A mon pere,Le Baron Philippe de Rothschild, renovateur de Mouton,]e dedie ce millesime de sa 65emeet derniere vendange. (내 아버지 필립 드 로칠드 남작님께. 무똥을 혁신한, 올해는 그의 65번째이자 마지막 수확이었다.)”
필립 남작은 보르도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신대륙에 눈길을 돌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의 선두주자이면서 와인의 고급화를 주도하고 있던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와 손잡고 오퍼스 원(Opus One)이라는 또 하나의 명품 와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필립 남작의 딸인 필리핀 여사는 남아메리카에 관심을 두고 칠레 최대의 와인회사인 콘차 이 토로(Concha Y Toro)와 제휴를 하여 1998년부터 알마비바(Almaviva)라는 명품 와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와인을 만들고 있는데 에스쿠도 로호(Escudo Rojo)라는 와인이다. 스페인말로 ‘빨간 방패’ 라는 의미이다.53) 1855년 샤또 라피트 로칠드가 메독 1등급으로 지정될 때부터 높은 품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무똥 로칠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118년이 지난 1973년 1등급으로 등급이 상향 조정되었지만 바론 필립드 로칠드는 샤또에서 병입을 하고 1924년 장 카를뤼에게 부탁하여 라벨을 만들고 1945년 필립 즐리앙(Philieppe Julian)을 시작으로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세자브 발다치니 (Cesar Baldaccini), 파블로괴카소(Pablo Ruiz Y Picasso), 엔디 워홀(Andy Warhol),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등 현대회화의 거장들이 라벨 제작에 참여했다.
샤또 무똥은 일종의 감성 마케팅(Emotion Marketing)54)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와인예술 박물관을 짓고 라벨 전시회를 갖는 등의 와인과 예술과의 접목을 시도한 새로운 마케팅을 시도한 브랜드라 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퍼스 원 알마비바 같은 해외합작을 통한 해외 명품 와인을 만들고 프랑스 명품 와인브랜드 중에서도 샤또 라피트와 함께 많은 역사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대표적인 브랜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인을 찾는 고객으로서는 빈티지에 따른 와인의 품질과 함께 매해 새롭게 이루어지는 세계적인 대작가의 작품이 반영되어 있는 와인을 보관하려는 또 하나의 상품 가치를 창조한 새로운 브랜드 마케팅의 실현품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