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불고기의 유래
불고기는 우리 나라 민족음식가운데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우수한 료리의 하나이다. 사람이 불을 알게 되면서부터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 식생활방법이 나오게 되였으며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이가공방법이 끊임없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불고기음식으로 되였다.
우리 인민들은 일찍부터 고기 굽는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책들에는 고기를 종이나 흙에 싸서 굽는 방법, 고기를 꼬챙이에 꿰여 굽는 방법, 지짐판이나 솥에서 굽는 방법, 고기를 꼬챙이에 꿴 다음 밀가루같은것을 묻혀 굽는 방법, 고기를 삶은 다음 다시 굽는 방법 등 여러가지 방법이 소개되여있다.
이러한 고기 굽는 방법에서 우리 인민들이 흔히 적용하여온것은 고기를 꼬챙이에 꿰거나 적쇠에 올려놓고 직접 불에 대고 굽는것과 철판(지짐판)이나 돌우에서 굽는 방법이였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운 우리 나라의 구이료리가운데서 세계적인 명물로 이름난것은 고기를 적쇠에 올려놓고 굽는 불고기이다.
소고기를 갖은 양념에 재웠다가 불에 구워먹는 불고기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료리이며 오늘 세계적으로 《조선불고기》로 널리 알려져있다. 우리 나라의 불고기는 고구려의 맥적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맥적》의 《맥》은 고구려의 기본주민집단을, 《적》은 구이를 가리켰으므로 《맥적》은 고구려의 불고기를 의미하였다.
불고기라는 말은 그 이후 시기에 나온것으로 보고있다. 17세기까지 우리 인민들은 불고기를 고기와 다른 음식감을 꼬챙이에 꿰여 양념에 재운 다음 불에 굽는 방법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경에 이르러 적쇠가 보급되면서 지금과 같은 적쇠우에 고기를 올려놓고 구워먹었다.
이때로부터 꼬챙이에 꿰여 구운 고기는 적, 산적으로 부르고 적쇠에 올려놓고 구운 고기는 보통 불고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꼬챙이에 꿰여 구운 고기도 불고기라고 하기도 하였다. 불고기가운데서 개성의 설야멱적이 특히 유명하였다.
설야멱적이란 눈오는 겨울밤에 먹는것이 제격이라는데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설야멱적은 양념한 소고기를 대나무꼬챙이에 꿰서 숯불에 구운 불고기인데 력사기록인 《음식지미방》, 《산림경제》에는 고기가 반쯤 익은것을 잠간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여 센 불에 굽는 일을 세번 반복한 다음 기름을 바르고 한번 더 구워내면 연해지고 맛이 좋아진다고 씌여있다.
조선소불고기가 일찍부터 세상에 명성이 높게 된것은 조선소의 고기맛이 특유한데도 있지만 보다는 우리 인민들이 소고기의 특성에 맞게 가공방법을 옳게 적용한데 있다.
소불고기는 소고기를 마늘과 참기름을 써서 만든 양념장에 재웠다가 적쇠에 올려놓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마늘에 들어있는 효소들이 고기를 연하게 하고 누린 맛과 잡맛을 없앨뿐아니라 마늘, 참기름의 향기가 소고기에 배여들어 불고기에서 독특한 맛이 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인민들은 소불고기 다음으로 꿩불고기를 일러주었다. 19세기의 료리책인 《시의방》에서는 꿩불고기가공방법에 대하여 《꿩을 그슬려 털을 뽑고 각을 떠서 가슴쪽의 살을 두세쪽으로 저미고 다리는 껍질만 벗겨 자른다. 마늘 다진것, 깨소금, 기름, 후추가루, 꿀을 섞어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고기를 버무려서 물에 적신 흰종이에 싸서 굽는다.
다른 방법은 양념에 버무리기전의 꿩고기를 물에 적셔가며 굽다가 반쯤 익으면 껍질을 벗기고 기름장을 발라 굽는다.》고 하였다. 오늘 조선불고기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인기있는 조선료리의 하나로 보급되고있다.
♣ 고소한 돼지대가리보쌈
돼지는 메돼지에서 기원하였다. 돼지가 사람에 의하여 길들여진것은 지금으로부터 9천년전으로 보고있다. 고조선시기와 세나라시기에 집짐승고기가운데서 생산량이 제일 많았던것은 돼지고기였다.
고구려벽화무덤에 돼지가 그려져 있는것이라든가 《삼국지》에 《돼지를 잔치에 보내기도 하고 제사때에도 썼으며 돼지기름은 추위를 막는데도 리용되였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돼지고기가 세나라시기에 중요한 음식감으로 널리 리용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세나라시기 이후에도 돼지를 많이 길렀는데 당시에는 종축을 전문으로 하는 가정들까지 있어 돼지고기생산량이 이전시기보다 급속히 증대되였다고 한다. 력사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돼지를 남쪽지방보다 북쪽지방에서 많이 길렀다.
돼지고기가 많이 생산되다보니 그것으로 만든 음식의 품종도 부쩍 늘어나 우리 나라 음식의 구성을 보다 풍부히 하였다. 옛 료리고전들에는 새끼돼지찜, 돼지내포탕, 돼지발족백숙 등 많은 돼지고기음식들을 기록하고있다. 지난날 평안도지방에서는 돼지를 먹이조건이 좋은 봄, 여름에 부쩍 길러 가을철에 가서 잡아먹고는 그 대가리를 건사했다가 설날이 오면 그것으로 보쌈을 만들어 먹군 하였다.
이 지방사람들이 설명절에 돼지대가리보쌈을 해먹는것을 풍습화한데는 정월명절에 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년중 건강하고 근심이 없어진다고 믿어왔기때문이다. 돼지대가리보쌈을 새우젓국에 찍어먹으면 닉닉한 감이 없고 고소한 맛이 더 나며 체하지 않는다고 한다.
♣ 조선료리의 걸작품 - 신선로
신선로는 고급하고 다양한 음식감, 상차림을 돋구는 호화롭고 흥미를 자아내는 그릇, 먹음직스러운 료리의 예술적꾸밈새, 끓는 음식감이 어울려 안겨오는 상쾌하면서도 후더분한 느낌 등으로 하여 조선료리의 걸작품으로 일러온다. 신선로는 우리 인민이 산해진미를 한번에 맛볼수 있게 꾸며놓은 희귀한 음식이다.
신선로를 만드는데는 소고기, 해삼, 왕새우, 떡국대, 밤, 대추, 호두, 잣 등 수십여가지의 음식감들이 쓰인다. 조선료리가운데서는 신선로가 음식감의 가지수에 있어서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수 있다.
매 음식감을 1차가공한 다음 다시 종합가공하는 신선로는 그것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음식이 그대로 먹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이 좋고 향기로운데다가 차림새 또한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것이 참으로 조선음식의 진미를 맛볼수 있게 하는 료리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선로를 《열구자탕》 즉 입을 기쁘게 해주는 탕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러왔다. 신선로는 본래 음식을 끓이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그릇이름인데 이것이 점차 그안에 끓인 음식의 이름으로도 되였다. 신선로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연산군이 조선봉건왕조 10대왕으로 있을때 일이다. 당시 시와 문장을 잘 짓는다는 정희량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였다.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기묘한 형태의 화로를 만들어 매일 허리에 차고다니면서 여러가지 산짐승을 잡거나 산나물을 채취하여 화로에 넣고 끓여먹으며 살았는데 그의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다고 하여 그가 끓여먹은 음식을 《신선로》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에서 사는 정희량을 만나 음식대접을 받았는데 그에게는 정희량의 생활이 《신선의 생활》같이 느껴졌고 더우기 대접받은 음식맛이나 그것을 끓이는 화로의 모양이 매우 신비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정희량과 만났던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퍼뜨리고 산에서 보았던것과 꼭같은 화로를 만들어 음식을 해먹으면서 그것의 이름을 신선이 쓰는 신비한 화로라는 뜻에서 또 신선이 먹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맛좋은 음식이라는 뜻에서《신선로》라고 지었다고 한다.
력사기록들에 의하면 지난날 신선로는 궁중음식의 하나로, 량반귀족들이 먹는 음식의 하나로 되여있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개성을 비롯한 중남부지방사람들이 주로 만들어먹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해마다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되군 하던 궁중연회들에는 반드시 신선로가 올랐으며 그 종류도 탕신선로, 면신선로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궁중연회음식의 하나로 되여있던 신선로는 점차 봉건량반들의 가정에 펴져나가 그들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였고 나중에는 비교적 살림이 넉넉한 가정들에서도 간혹 만들어먹었다. 신선로는 정말로 진귀하고 품위있는 음식인것으로 하여 지체높은 량반들도 년중 몇번 먹어보지 못하였다.
먹어보았다고 해야 명절가운데서도 제일 큰 명절로 여겨온 설날이나 생일 60돐과 같은 큰 가정대사때였을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삼과 왕새우와 같은 질좋은 해산물이 많아 진짜 신선로가 나올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신선로가 그렇듯 유명해지게 된것이다.
신선로는 맛이 좋을뿐아니라 많은 영양소들을 골고루 함유하고있어 건강과 장수에 좋은 음식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다. 또한 그릇이 우아하고 특이한 모양새를 가지고있으며 음식감이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며 직접 끓이면서 먹기때문에 소화흡수에는 물론 위생문화적으로도 매우 우월한 음식이다.
신선로는 여러 사람들이 같이 또 나누어먹게 만든 음식이므로 신선로를 내는 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따로따로 떠놓고 먹을수 있게 작은 보시기와 숟가락을 함께 놓았다.
♣ 특색있게 조리한 조선식 양고기료리
우리 나라에서 양은 이미 고대시기부터 사육되였지만 8~9세기경까지는 주로 국가적인 제사때 제물로 쓰기 위해 길렀다. 양고기가 식용으로 쓰이기 시작한것은 고려시기였다고 볼수 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양고기는 《왕공귀족이 아니면 먹지 못하였다.》(《고려도경》)고 한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궁중이나 량반관리들속에도 양고기료리가 일정하게 보급되였다. 우리 선조들은 양고기료리를 함에 있어서도 양고기의 고유한 노린내가 조선사람의 식성에 맞지 않기때문에 소고기나 단고기료리를 만들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다시 말하여 조선사람의 식성과 기호에 맞게 고유한 우리식 고기료리법으로 양고기료리를 만들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력사책과 전문료리책들에 수록된 몇가지 양고기료리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솥에 토막낸 양대가리를 물, 파, 생강, 후추 등과 같이 넣고 푹 고은 다음 식혀서 편육을 만들었다.
○ 솥에 참대같은것을 걸치고 분지씨, 식초, 술, 양념으로 재운 양고기를 안친 다음 푹 쪘다. 먹을 때 양념이 배인 고기와 솥바닥에 고인 즙을 같이 먹었는데 이 방법은 고기찜이나 단고기《소주》를 만드는 방법과 비슷하다.
○ 양고기를 적당히 토막내여 물이 조금 든 단지에 넣고 그 아구리를 종이로 봉하여 푹 끓인 다음 술, 식초, 장, 생강 등을 넣고 익혔다.
○ 밸을 깨끗이 씻고 그속에 피를 채워서 삶았다.
○ 양갈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양념에 재웠다가 구웠는데 굽는 과정에 찬물에 담그었다가 꺼내는것을 3번정도 반복하면서 익혔다.
○ 갈비나 내장으로 국을 끓이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많은 량의 향신료와 소금, 후추, 식초 등을 리용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전통료리들인 편육, 단고기《소주》, 선지피순대, 설야멱적 등의 가공방법을 양고기가공에 특색있게 적용하여 양고기료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료리가공방법은 양고기를 즐겨먹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