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방식은 이미 원시시대에 형성되였다. 우리 선조들은 원시시대와 고대에 피, 조, 기장, 수수, 콩, 팥, 벼를 생산하였으며 이때부터 밥을 지어먹었다.
밥이라는 말이 기록상 처음으로 나타난것은 중세기 초인 세나라시기부터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밥》, 《찰밥》이라고 기록되여있다. 옛날에는 밥이란 말을 여러가지로 표현하였는데 고려시기에는 《박거》라고도 하였다.
밥은 낟알만으로 지은 맨밥과 2~3가지이상의 낟알로 지은 잡곡밥, 여러가지 부음식감들을 리용하여 특이한 맛을 내는 밥료리도 만들었다. 밥을 주식으로 해온 우리 인민들은 밥과 관련한 속담유산도 많이 남겨놓았는데 식생활분야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아무리 아름다운 금강산도 밥을 먹어 배가 불러야 구경할 재미가 있다는 뜻으로 배가 고파가지고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음을 형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또한 《밥 한알이 귀신 열을 죽는다》,《밥이 약이다》, 《밥그릇밑에 건강이 있다》등 속담들은 밥을 많이 먹어야 건강하고 앓지 않는다는 뜻으로 앓는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려면 밥을 잘 먹고 몸보신하는것이 기본이라는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밖에도 《가마가 검기로 밥도 검을가》, 《고운 일하면 고운 밥 먹는다》, 《밥은 열곳에 가서 먹어도 잠은 한곳에서 자랬다》, 《밥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 《밥 푸다 말고 주걱 남 주면 살림을 빼앗긴다》, 《밥인지 죽인지는 솥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등 생활적인 속담들이 많이 전해 온다.
♣ 국수
국수는 천년이상의 력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고유한 민족음식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국수는 불교절간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한다. 불교가 번창하던 고려시기(10세기경) 우리 나라 어느 한 절에 칼제비국을 몹시도 좋아하는 대사(중의 우두머리)가 있어 그 절의 중들은 아침저녁을 칼제비국을 만들어 먹였다고 한다.
어느해인가 그 절에서 우리 나라 중들의 회합이 었었는데 그 많은 중들에게 칼제비국을 해먹이자니 손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 절간의 중들이 생각해낸것이 반죽물을 분틀에 넣고 눌러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처음의 국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국수의 조상은 칼제비(칼국수라고도 함)라고도 할수 있다.《칼제비 잘하는 사람이 국수도 잘한다》는 옛말도 칼제비와 국수가 인연이 가까운 음식이라는데서 나온것이였다. 국수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이 누구나 좋아하며 즐겨먹는 음식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는 언제나 밥상과 함께 국수상이 있으며 잔치상이나 돌상에는 의례히 국수를 곁들이는것이 풍습으로 되고있다. 국수에 대한 기록은 고려말기에 처음 보인다.
1444년에 씌여진 《룡비어천가》에는 고려의 장수였던 최영이 손님을 대접할 때마다 국수와 반찬을 분담하여 준비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해동역사》에는 고려때 나라안에서 밀이 많이 나지 않아 국수값이 비싸므로 크게 차리는 잔치가 아니면 쓰지 못하게 하였다고 씌여있다.
이 두 기록자료들에 의하면 국수는 이미 고려시기에 널리 보급되여 있었으며 따라서 그 이전시기에도 이미 있었던것으로 짐작할수 있다. 국수에는 국수오리를 만드는 기본음식감에 따라 메밀국수, 밀국수, 감분(농마)국수, 강냉이국수 등이 있었다. 이러한 국수들은 기본음식감에 한가지 또는 여러가지 음식감을 섞어 만들기도 하였다.
그것은 《음식지미방》이나 《주방문》, 《시의방》에 메밀국수를 메밀가루에 록두가루나 찹쌀을 끓인 물을 섞어 국수를 만든다고 한 기록과 밀국수를 밀가루에 닭알을 섞어 만든다고 한 사실을 통해서 잘 알수 있다.
국수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실국수, 칼국수, 올챙이국수 등으로 나누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수는 분틀에 눌러서 만든 실국수를 말한다.
옛 기록들에 국수에 대하여 《나무문으로 들어가서 쇠문을 지나 더운물에 목욕하고 다시 찬물로 목욕하고나서 갈밭에 드러누운것》으로 쓴것이 있는데 이것은 국수반죽물을 분틀에 넣어서 국수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생동하게 묘사하고있다. 국수는 그 조리방법에 따라 《랭면》, 《온면》, 《비빔국수》로 나누는데 그에 따라 국물과 꾸미를 달리 하였다.
♣ 세상에 이름난 민족음식 국수
국수는 여러가지 가루를 리용하여 사리를 만들고 여기에 국수물, 꾸미와 고명감을 넣어 만든 음식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우리 나라의 국수는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과 밀접히 결부되여있는 훌륭한 민족음식중의 하나이다.
고려시기에 쓴 책인 《룡비어천가》에 고려사람들이 손님들을 대접할 때 국수를 많이 썼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국수가 고려시기는 물론 그 이전시기부터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 널리 리용되여왔으며 그 가공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른 음식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무더운 여름철이면 얇게 썬 시원한 배와 오이, 삶은 꿩고기, 닭알전을 꾸미로 놓고 얼음을 박은 국수를 으뜸가는 음식으로 여겼으며 추운 겨울에는 따끈한 고기국물에 말고 양념과 고기를 놓은 국수를 즐겨먹었다.
특히 생일날, 잔치날을 비롯한 대사때에는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없어서는 안될 별식으로 여겼으며 민속명절날에도 여러가지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우리 나라에는 음력 정월 작은 보름(14일)날 점심이면 긴 국수오리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국수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국수는 리용하는 가루종류에 따라 메밀국수, 감자농마국수, 강냉이국수, 밀국수 등으로 나누며 마는 방법에 따라 찬국수, 더운국수, 쟁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회국수 등으로 나눈다. 소비적특성에 따라서는 물국수, 마른국수, 즉석국수, 분탕 등 여러가지가 있다.
예로부터 랭면이나 쟁반국수는 평양지방의 유명한 음식이다. 특히 평양랭면은 국수사리를 향기롭고 구수하며 촉감이 부드러운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들고 국수물로는 동치미국물과 영양가 높은 소고기국물을 리용하는데로부터 우리 나라의 국수중에서도 제일 맛좋은 국수로 널리 알려져있다.
감자농마국수는 소고기국물을 국수물로 쓰는 함흥감자농마국수가 유명하다. 감자를 많이 심는 지방들인 혜산, 삼수, 갑산일대에서 만들어 먹는 감자농마국수는 고소하고 달큰한 콩깨국을 국수물로 하는것이 특징이다.
강냉이국수나 올챙이국수는 강냉이산지로 유명한 창성, 삭주, 태천, 벽동, 녕변, 자성, 의주지방에서 많이 만들어 먹고있다. 강계, 만포지방에서는 느릅나무뿌리가루를 섞어 만든 질기고 매끈매끈한 강냉이가루국수를 많이 만들어 먹고있다.
이외에도 우리 인민들은 공통된 민족적기호에 기초하여 서로 다른 지방적특성을 반영한 여러가지 국수를 특색있게 만들어 먹고있다.
국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슬기와 창조적지혜의 산물로서 오랜 력사적과정을 통하여 계승발전되여온 우수한 민족음식이다. 무엇보다도 국수는 그 어느음식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어 사람들의 식욕을 돋구어준다.
국수의 기본음식감인 국수사리의 맛은 국수의 독특한 맛을 살리는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메밀가루나 밀가루, 강냉이가루 등을 리용하여 만든 국수사리는 구수한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특히 향기롭고 구수하며 촉감이 부드러운 메밀가루를 리용하여 만든 국수사리는 독특한 향기와 구수한 입맛을 낸다.
감자, 록두, 강냉이농마를 리용하여 만든 국수사리는 희고 가늘며 매끈매끈하여 눈맛을 살려주는 동시에 질긴것이 특징이다. 메밀가루나 밀가루, 강냉이가루에 감자, 록두, 강냉이농마를 알맞춤하게 섞어 만든 국수사리는 매끈매끈하고 구수한 맛과 질긴 맛이 잘 어울린 독특한 맛을 낸다.
국수물은 시원하고 산뜻하며 감칠맛이 있어 국수의 독특한 맛을 살려준다. 국수물로서는 예로부터 김치국물과 고기국물이 유명하다. 김치국물중에서도 동치미국물은 대단히 맑고 쩡한 맛, 향기롭고 산뜻한 맛, 새큼달달한 맛이 있어 예로부터 랭면을 마는 국수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고기국물은 맑고 산뜻할뿐아니라 단맛과 구수한 맛이 한데 어울려 감칠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국수꾸미나 양념도 국수의 맛을 독특하게 살려준다.
고기, 물고기, 남새, 과일 등으로 만든 꾸미의 맛은 국수오리의 맛, 국수물의 맛과 조화를 이루면서 국수맛을 돋구어주며 양념장과 곁들이는 겨자나 식초 등 여러가지 양념감들은 국수의 입맛과 향기를 살려준다. 이처럼 국수는 그 어느음식에도 비길수 없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다.
아시아나라들과 일부 유럽나라들에도 국수와 비슷한 음식들이 많지만 우리 나라의 국수와 같이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는 음식은 찾아볼수 없다. 다음으로 국수는 영양가가 높고 소화흡수가 잘된다. 국수는 국수사리와 국수물, 꾸미에 당질, 단백질, 기름질, 무기질, 비타민의 5대영양소가 충분히 들어있으므로 영양가가 아주 높다.
국수가루는 당질의 주되는 원천으로서 영양학적가치가 높다. 특히 메밀은 리진과 트립토판을 비롯한 필수아미노산함량이 다른 낟알에 비하여 특별히 높으며 불포화기름산함량이 포화기름산함량에 비하여 4배나 된다.
또한 비타민 P의 일종인 루틴이 많이 들어있을뿐아니라 비타민 B₁, B₂과 철함량이 높다. 그러므로 메밀국수를 정상적으로 먹으면 뇌혈전, 고혈압병, 동맥경화증과 같은 병들을 예방할수 있으며 방광염, 빈혈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
국수국물로 리용하는 동치미국물을 비롯한 김치국물은 사람의 몸에 필요한 비타민 C와 여러가지 광물질을 공급해주는 훌륭한 원천이다. 소고기국물이나 닭고기국물을 비롯한 고기국물은 함질소 및 무질소에끼스물질과 함께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있으므로 소화액분비를 촉진시키는 동시에 강장작용을 한다.
국수꾸미도 여러가지 영양소들을 많이 가지고있으므로 국수의 영양가를 높이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수는 다른 음식에 비하여 소화흡수도 잘된다. 일반적으로 강냉이를 그대로 먹었을 때 소화흡수률이 30~40%밖에 안되지만 강냉이가루로 국수를 눌러 먹으면 소화흡수률이 86~90%에 이른다.
또한 밀쌀로 밥을 지어먹었을 때 소화흡수률이 75%밖에 되지 않지만 가루내여 국수를 눌러 먹으면 소화흡수률이 95%로 높아진다.
밥이나 떡을 먹었을 때 비하여 국수를 먹었을 때 배고픈감을 먼저 느끼게 되는것이라든가 《국수가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다.》는 말이 생겨난것은 국수가 어떤 음식보다도 소화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라는것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라고 말할수 있다.
다음으로 국수는 가공방법이 독특하고 가공공정의 현대화에 유리할뿐아니라 식생활을 간편하고 문명하게 조직할수 있게 하는 훌륭한 음식이다.
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분통에 넣고 일정한 압력을 주어 국수오리를 뽑은 다음 1~2분의 짧은 시간안에 끓는 물에 삶아내고 찬물에 식히는 방법은 다른 낟알음식가공에서 찾아볼수 없으며 이러한 가공방법은 오직 우리 나라 국수가공방법밖에 없다.
국수는 음식감준비, 반죽, 누르기, 삶기 및 씻기 등 그 가공공정의 구분이 뚜렷하고 단순한데로부터 매 가공공정마다 현대화를 실현하는데 유리하다. 또한 마른국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가공국수는 모든 가정들에서 품을 적게 들이고도 짧은 시간안에 음식상을 차리는데 아주 유리한 음식으로 된다.
다음으로 국수는 그 어느 음식과도 비길수없이 대중봉사에 편리하다. 국수는 적은 로력으로도 단위시간당 생산능률을 높여 짧은 시간안에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원만히 보장할수 있는 훌륭한 대중봉사음식이다.
국수는 한그릇에 국수사리와 국수물, 꾸미와 고명이 다 들어가게 만든 음식으로서 그릇리용이 단순하고 상차림이 매우 간단하다. 국수는 끼당 식사시간이 다른 음식들에 비하여 훨씬 짧기때문에 적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보장하는데 유리하다.
이처럼 국수는 맛과 영양가에 있어서나 가공과 봉사에 있어서 그 어느음식에도 비길수 없이 우월한 민족음식이다. 하기에 우리 인민들은 물론 우리 나라에 찾아오는 수많은 외국손님들도 국수를 즐겨 찾으며 《천하별미》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조선국수 특히 평양랭면의 가공방법을 배워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 떡
떡은 낟알이나 낟알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만들거나 쌀을 쪄가지고 쳐서 만든 음식이다. 떡은 조선사람 누구나 즐겨먹는 우리 민족의 특색있는 주식물의 하나이다. 떡이 생겨난 력사는 시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약 4000년전)부터였다고 볼수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릉의 앞칸 벽화에 시루를 얹어놓고 무엇을 찌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을 떡 찌는 모습이라고 볼수 있다. 신라에서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두 왕자사이에 떡을 씹어 누구의 이발자리가 더 많은가 하는것을 보고 왕위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삼국사기》는 전하고있다.
떡은 명절에는 물론 생일이나 혼인잔치때 환갑을 비롯한 경사로운 날에 만들어 먹는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였으며 항간에서는 떡방아 찧는 소리와 떡치는 소리가 높이 울려야 명절기분이 나고 잔치기분이 난다고 하였다.
백결(458~479년)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방아타령》의 노래를 통해서도 세나라시기에 떡을 만들어 설날에 먹는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가 지고 달이 바뀌여 한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그믐께 이웃들에서는 모두 쌀방아를 분주히 찧건만 백결네는 살림이 구차하여 아무런 준비도 할수 없었다. 그의 안해가 방아소리를 들으면서 남들은 다 낟알이 있어서 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낟알이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쇠겠는가고 푸념을 하였다.
이때 백결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노래를 지어 위로하겠노라고 하면서 거문고를 타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였는데 방아소리와 신통하였다 한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여 쳐서 사람들은 그 이름을 대악《방아타령》이라고 하면서 방아를 찧을 때마다 불렀다 한다.
우리 인민들은 절기에 따르는 명절들에는 떡을 먹어야 명절을 쇠는것 같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낟알로 갖가지 떡을 만들어 먹기 위해 애썼다. 계절음식과 명절음식을 번지지 않고 해먹은것은 부유한 집들뿐이였고 가난한 집들에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지만 오랜 력사적과정에 떡은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서 떼여놓을수 없는 특식의 하나였다.
하기에 떡과 관련하여서는 밥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일화와 설화, 속담들도 많이 전해 오는데 먹는것과 관련된 속담으로서는 밥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일상시에는 밥을 먹고 명절에는 떡을 특식으로 해먹던 풍습을 반영하여 《밥우에 떡》또 떡은 명절이나 잔치때뿐아니라 귀한 손님이 올 때에도 장례나 제상때에도 만들었으므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도 생겼다.
《오는 떡이 커야 가는 떡이 크다》,《떡으로 치면 떡으로 치고 돌로 치면 돌로 친다》는 속담은 선은 선으로 갚고 악은 악으로 갚는다는 뜻으로서 우리 인민들이 어찌다 떡을 하면 혼자 먹지 않고 이웃집에 맛을 보라고 인사를 차리는 미풍량속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호상성을 특징짓는데 다른 물건이 아니라 떡을 등장시킨 속담들이다.
이밖에도 《선 떡 가지고 친정간다》, 《친아비 장작패는데는 안가고 이붓애비 떡 치는데는 간다》, 《보기 좋은 떡 먹기도 좋다》 등 해학적이고 생활적인 소재의 속담과 격언들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 죽
지난날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서 주되는 주식물의 하나는 죽이였다. 죽은 낟알을 기본음식감로 만드는데 밥지을 때보다 물을 2~3배 더 두고 끓여 낟알이 푹 퍼지도록 만든 음식이다. 우리 선조들이 죽을 쑤어 먹기 시작한것은 알곡재배를 시작한 원시사회부터였으며 밥보다 먼저 먹어왔다고 볼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조선봉건왕조말기까지도 죽은 보편화된 주식으로 되고있었는데 이것은 18세기의 기록에 《길가에서 죽 파는 소리 그칠새 없다》고 한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우리 나라의 력사기록과 민속자료에서 볼수 있는 죽은 80여가지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조리방법이 다양하고 약리적효과도 높았다.
이로부터 민간에서는 훌륭한 며느리가 되자면 스무가지의 죽을 쓸줄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전해지고있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많은 가정들에서 아침에 주식으로 흔히 죽을 먹었으며 로인들속에서는 아침밥을 먹기전에 죽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보양을 목적으로 하는 외에 늙은이와 몸이 허약한 사람이나 병이 있는 사람들의 건강회복을 위한데도 있었다. 죽은 또한 먹기가 편리한데로부터 장례 때 상주들을 위한 음식으로도 쓰이였다.
조선봉건왕조초기 봉건국가가 규정한 《극조오례의》라는 책에도 《장례때 슬픔에 지쳐서 밥을 먹을수 없으니 죽을 먹으라》고 하였고 민간에서는 상가집에 팥죽을 쑤어 보내는것을 미풍량속의 하나로 전해 왔다. 죽에는 알곡만으로 쑨 죽과 알곡에 여러가지 음식감로 넣어서 쑨 죽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