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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5. 권숙자, 경기도 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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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이야기

♣ 백영숙

1964년생, 함경북도 무산군

2009년 남한 입국

백영숙 임진강예술단 단장은 북한의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태어나서,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하셨다. 현재는 파주시에서 북한이탈주민 전문예술단체 임진강예술단을 설립해 북한의 전문 예술을 알리는 일을 하고, 북한 전문 음식점 ‘두만강 찹쌀순대'를 2년째 경영하고 있다.

♣ 예술단, 그리고 보금자리로서의 북한음식점

한국에서 처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종이 상자를 만드는 회사에서 3년을 일해 돈을 모았어요. 북한에 있는 아들 하나를 못 데리고 왔는데, 그 아이를 데려오려고 무척 열심히 벌었습니다.

그렇게 아들 데리고 오고 나니 남은 돈이 좀 있었는데 마침 파주시에서 탈북민 지원도 해주기에 예술단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지방 공연을 갔다 오면 때로는 밤11시, 12시가 되도록 저녁도 못 먹고 너무 배가 고프니까, 북한 생각이 자주 나는 거지요. 단원들이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자그마하게 만든 것이 지금 식당인데, 편하게 밥 먹고 헤어지고 그런 공간이 되다보니까 지역사회에서 그래도 입소문도 나고요.

♣ 함경도의 순대

북한에서는 쉽게 어느 가정이나 고기를 마음 놓고 사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이 곱창은 조금만 사도 야채, 선지 등을 많이 넣고 얼렸다가도 먹을 수도 있잖아요. 창고 위에 얼려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내려서 먹는, 그런 함경북도에서 그래도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옛날부터 ‘찹쌀순대’라고 했던 것은 아니고 할아버지가 만들어서 이 음식을 가족이 내리내리 구워서 먹는 음식이라 해서 ‘함경도 할배순대’라 했어요. 함경도 할아버지가 연구해서 만든 거 에요. 한국에 와서 제가 의정부, 전국 각지에 그래도 순대집이라고 생긴 데는 여러 곳을 많이 다녀 봤어요.

그런데 한국 순대는 비닐 곱창에 만드는 것이 많더라고요. 북한 순대는 진짜 돼지 곱창만을 써요. 또 한국순대는 당면을 많이 넣잖아요. 북한 순대는 옛날부터 찰진 낱알을 넣어요. 선지가 들어가고요.

♣ 어머니가 만드시던 방식을 살려 만든 찹쌀순대

저희 집이 할머니 때로부터 함경도에서 순대 장사를 전문으로 해온 집이었어요. 저희 형제가 7남매인데 그 많은 식구들을 우리 어머니가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은 것은 순대장사 덕이었어요. 저희 무산은 산간지대고 해발 높이가 1,200m가 넘는 그런 산골이에요.

논밭이 없어서 감자, 옥수수가 주식인데 순대를 하려면 재료가 낱알이 많이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옥수수 쌀 가지고, 맨 옥수수로 하면 찰기가 없어서 잘 안 되니까 좁쌀, 찰 좁쌀을 섞어서 찹쌀하고 똑같은 그런 쫀득쫀득한 맛요.

한국에 와서 저희가 만드는 순대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만드시던 것과 똑같은 공정과 똑같은 재료를 쓰는데, 한국은 찹쌀이 흔하니까 쌀만 찹쌀로 대체했어요. ‘내기’는 북한 추운 지방에서 나는 풀이어요. 내기를 넣으면 순대 비린내를 제거해주는 역할을 하고 또 향을 더해줘요.

그런데 내기가 남한에 없기 때문에 이 내기만은 중국을 거쳐서, 중국 조선족 분들이 가져다가 장사를 해요. 내기는 꼭 넣는데, 이 맛이 또 우리 북한 순대의 포인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 못 이룬 의사의 꿈을 접고 인민군 간부가 되다

저는 의대를 가려 했어요. 북한에서는 그게 제일 최고 직업이니까. 의대를 졸업해서 힘들게 사는 아버지 어머니 도와주고 우리 가정이 경제적으로 편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여기로 말하면 검정고시죠, 시험 다 치고 합격 다 맞았댔어요.

가는 것만 남았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맏오빠가 군대를 나가고, 둘째 오빠가 대학가고, 이렇게 되다 보니까 돈이 없어 어머니가 의대를 안 보내주셨어요. 그게 정말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어머니, 그 대학 못 가게 붙들던 그때가 생각나서 돈을 북한에다가 보내줘요. 굶어죽지 말라고. 이따금 어머니 생각하면 자다가도 내 가슴이 다 미어져요.

‘그때 엄마가 나를 보내줬으면 내가 지망하던 대학 나오고 내가 바라 던 그 이상이 다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도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학 나왔다 해도 뭘 해야 얼마나 했겠어요. 대학을 못 가니까 사람이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나보다 실력적으로 못한 아이들도 대학에 갔는데 얼마나 기막힌 일이에요. 고민하다 제가 제 힘으로 군대를 갔어요. 북한에는 여성들이 군대를 가기가 김일성 정치대학 나오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군사당국에 가서 검사했는데 다 맞고, 또 가정이 아버지 때로부터 우리는 당 간부로 해 왔으니까, 그게 다 맞아서 뽑혀서 군대를 갔어요. 그런데 군대 갔으면 입당은 무조건 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서 설 자리가 하나도 없어요.

대신 북한은 10년 동안 가서 군사복무를 마치고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제대 6개월 전에 벌써 파견장이 내 거주지 있는 도청에 가 있어요. 말마따나 공무원이 되는 거지요. 독재국가이지만 그 나라에서 해주는 혜택은 그런대로 다 받고 살아왔죠.

♣ 북한에서의 여성의 삶

남한은 제가 보면 여성들이 고위직에 있는 경우가 드물더라고요. 북한은 ‘인덕정치’라 해서 1989년도부터 여성간부화를 확대할 수 있는 그런 방침이 내려와서 여성간부가 많아요.

북한은 그래도 여성들이 설 수 있는 뭐가 있어요. 그런데 북한은 옛날 풍습이 있어서 남편을 하늘이라고 그래요. 하늘처럼 모시고 살아요. 1998년도에 고난의 행군을 걸으면서 그게 바뀌었습니다.

먹을 게 하나도 없고 배급도 안주는데, 가정에서 애들도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남편이라고 가만히 집구석에 앉아 있으면 그걸 어떻게 이해를 해요. 그때 ‘다 같이 일해서 이거 먹고 살아야 되겠다’하는 그런 개념이 여성들에게 생겼어요.

여자들이 남자를 막 두들겨 패고요. 나가서 일하라고요. 지금은요, 남성들이 설 자리가 하나도 없어요. 북한에서 지금 다 이혼해가지고 한 70%는 다 여성 혼자 살아요 애들 데리고. 남자는 ‘불편’이라고.

♣ 이산가족이 되기 전에 가보고픈 고향

고향이 그립지요. 고향에 어머니도 있고 형제들도 남아 있으니까. 명절이면 맛있는 음식도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 거기서야 뭘 먹을 수 있겠어요. 추울 때 얼어 죽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북한을 탈출할 때는 오직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정신 없이 달려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안정적인 삶을 살다 보니까 가족이 그립지요. 한국에 와서 보니까 실향민들이 정말 70여 년 동안 집에도 못 가보고 그런 분들 보니까 덜컥 겁도 나고.

조만간 저희도 여기 온지 10년이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요즘엔 또 평화와 화해의 이런 분위기가 있으니, 통일을 바라만 보지 말고 우리도 함께 만들어서, 고향에 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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