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음식이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음식은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음식 이야기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울산에도 울산의 시간과 공간을 담은 음식이 적잖다. 다양한 음식 가운데 조갯국과 몰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2년 2월 3일 대통령 박정희가 울산을 찾았다. 박정희가 참석한 가운데 공업도시 지정을 선포하는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및 10여 최고위원, 송요찬 내각수반, 금감경제기획원장을 비롯한 정부각료 〈상바루〉프랑스 외교단장을 비롯한 각국 외교사절과 서울에서 내려온 2백여 명의 내빈, 그리고 네 번에 걸쳐 무료로 임시열차를 타고 온 3만 명을 헤아리는 현지 및 인근주민들이 이 식전에 참여하여 울산골은 사상 처음으로 맞는 성사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94)
울산 역사상 최대의 이벤트에 초대된 울산사람들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구 7만 명에 불과한 동해안의 작은 마을이던 울산이 인구 백만의 광역시가 되고, 훗날 서울 강남을 능가하는 고소득의 도시가 되는 첫 발을 내 딛는 날이 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울산 사람들 중 그 날이 그들의 일상을 뒤 흔드는 날이 될 것이라는 짐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상당수가 고향을 잃는 실향민이 될 것이라는 사실, 그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다시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날은 울산음식 문화의 대변혁을 알리는 날이었다. 공업도시가 음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아 정말 맛있었는데.”
중앙일보 기자인 안충기는 “울산에 사는 김구한 울산대 교수는 고향이 울산인데 실향민이다.”라고 표현한다.95) 실향민이라는 단어는 사뭇 충격적 이다. 실향민이 고향을 잃고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이나 댐 건설 등으로 인해 고향이 수몰된 사람들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집을 옮기는 일, 옆 동네로 이사 가는 일이 빈번한 현대이지만 공단이 생기면서 고향을 빼앗긴 울산 사람들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상처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고향이 변해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하는 아픔뿐만 아니라 즐겨먹던 음식과 입맛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실향민으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그리움과 아픔을 외로이 버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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