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보다 우뭇가사리가 많았던 울산 앞바다
울산 앞바다에 비행기가 정찰을 했다. 1930년대 어느 날 사람들은 정체 모를 비행기를 지켜봤다. 비행기는 울산 앞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띄워진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비행기를 띄워 조사할 만큼 울산 앞바다의 물고기들은 다양하고 많았다.46)
울산 앞바다는 물고기도 많았지만 해초도 다양하고 풍부했다. 미역, 김도 품질이 좋고 양이 풍부했다. 특히 우뭇가사리가 많았다.47) 우뭇가사리는 진상되었는데, 그 기록이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울산군 자료에서 나타난다.
이후 1832년『경상도읍지 울산부』에서 진상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뭇가사리는 300여 년 동안 울산의 대표 진상품 중의 하나다. 울산의 우뭇가사리가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조선인들이 생산하는 해조류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우뭇가사리였다.
장생포항과 미포항에서 많이 나왔다.48) 1917년에 간행된『울산안내』에도 “장생포를 우뭇가사리의 집산자”로 소개하고 있다. 1933년『울산군향토지』에서도 강동면, 동면, 대현면, 온산면, 서생면 등 울산의 전 해안에서 우뭇가사리가 난다고 했다.
우뭇가사리는 처음에는 고수익을 올리는 해조류가 아니었다.49) 우뭇가사리가 양갱, 젤리 등에 사용되거나 공업용 접착제, 방수제의 연료로도 쓰이게 되면서 수요가 증가했다. 특히 일본에서 우뭇가사리 수요가 증가했다. 수요의 증가는 가격 급등으로 나타났다.
1916년 우뭇가사리는 미역의 66배였다. 이는 점점 증가하여 1930년대에는 1,033배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우뭇가사리 였다.50) 우뭇가사리의 전성기였다. 울산 바다와 바닷가 마을은 우뭇가사리를 캐러온 해녀들로 북적거렸다.
우무풀은 달이면 묵처럼 엉기는데 이것을 한천이라고 하여 식용으로도 좋지만 그보다는 의약품, 화장품 소용으로 더 많이 나갔다. 우무풀은 제주 바다에도 나긴 하지만 이 울산 바다가 생산량이 네 곱절 많았다.
제주 1만 잠녀 중에 3천여 명이 해마다 육지로 물질 나가는지라, 한반도 삼면의 바다 해안선을 따라 안 간 곳이 없는데, 그 중에 우무풀을 위주로 물질하는 곳은 경남 . 경북지방이었다.51)
제주 출신 소설가인 현기영이 그린 소설 속 한 부분이다. 육지를 찾은 삼천여 명 중에서 울산을 찾은 해녀들은 우뭇가사리를 수확했다. 울산은 제주보다 우뭇가사리가 많았다. 우뭇가사리는 늦봄부터 여름까지 채취가 가능했다. 그 시절 울산에서 우뭇가사리를 채취했던 제주 해녀 현수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4년간 돈을 벌기 위해 울산 방어진까지 원정 물질을 떠났다. 이곳은 특히 우뭇가사리가 많았다. 우뭇가사리는 일본에 전량 수출되는 효자 품목이었다.
우뭇가사리가 원료인 한천이 일본인이 즐겨먹는 양갱의 주재료이기 때문이다. 실력이 뛰어나 한 달간 60kg 들이로 80포대나 수확해 방어진수협에서 수확량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광목원단을 받았을 때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52)
그녀는 4년 동안 울산 앞바다에서 물질을 했다. 그 때 방어진수협에서는 우뭇가사리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해녀들을 대상으로 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뭇가사리를 많이 수확한 해녀에게 ‘광목원단’이라는 부상을 걸었던 것이다.
우뭇가사리가 해녀들의 손을 통해 수확되는 만큼 그들을 격려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1966년 한국에서 생산되는 우뭇가사리의 80~90% 이상이 수출된다. 우뭇가사리는 대표적인 외화획득 수단이었다.53)
이후에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 우뭇가사리의 수출이 줄어들게 된다. 우뭇가사리의 몸값도 추락하기 시작한다.54) 1980년 7월 17일『동아일보』는 바다에서 많이 나기 때문에 아주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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