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참외는 재래종인 당참외, 먹참외 였다. 당참외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서 구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태 소장이 기억하는 참외는 “붉은끼가 나고수박처럼 줄이 있었다. 속이 검다.”114) 양명학 울산대 명예 교수도 비슷한 기억을 풀어냈다.
작은데 속이 빨개요 붉은빛이 돌아요 노란색이지만 붉은빛이 돌아. 아주 맛이 좋았어요. 옛날에는 울산 당참외를 궁중에 임금님께 진상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기록에는 없는데.115}
당참외의 맛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잖다. 달고 맛있는 맛이었다고 회고한다. 다행스럽게 먹참외는 농촌진흥청 발간한 자료에서 보인다. 먹참외는‘열매가크고 껍질이 검푸른 색을 띤 참외’를 말한다. 아래는 농촌진흥청의 자료에 실린 참외 사진이다.116)
사진으로 보다시피 우리가 생각하는 샛노란 참외가 아니다. 녹색 껍질의 참외가 당황스럽기도 하다. 수박과 멜론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참외는 광복절 전후에 많이 생산되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가져다 준 선물이다. 더위를 이겨낸 만큼 당도가 높았다.
출하를 맞이한 울산 참외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참외가 출하되는 시기가 되면 울산 참외가 출하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참외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일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신문 기사의 사진 속에 혹시 그 시절 달리 농부가 있지나 않을까. 8월 달리의 농부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참외밭을 찾는다. 울산 시장에 가서 팔 참외를 따온 후에 아침을 먹는다. 이후 시장에 가 참외를 판다.117) 참외 농가는 또 있다.
또 다른 참외 농가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안주인이 참외를 팔러 나간다. 안주인이 참외를 팔러 나간 시간은 오후이다. 4시경에 참외를 가지고 나가 저녁 6시 경에 집에 왔다.118) 참외가 오전, 오후를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팔렸음을 알 수 있는 정보이다.
참외는 태화강이 품고 키웠다. 태화강의 강변이 참외를 키우기에 적합했다. 울산을 서 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태화강은 유로연장 47.54km이고, 유역면적 626.4㎢이다. 그래서 '태화강백리’라고한다.
참외는 고온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데 물이 잘 빠지면서 수분을 잘 지니고 있는 땅이 좋다.119) 태화강 상류인 상북면의 강변에서 참외 농사는 흔했다.120) 언양읍에서 자란 오영수의 작품에도 참외와 얽힌 이야기가 남아있다.
태화강 하류인 조개섬, 달동 등에도 참외는 잘자랐다. 태화강 전역에서 참외가 자란 셈이다. 옆의 사진은 1933년과 1934년 시장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참외가 트럭에 실려 출하되는 장면이다. 참외가 예상외로 크다. 참외라고 하지만 수박과 비슷한 크기 이다.
참외를 실어온 지게와 참외를 팔러온 농민들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성인 남자의 허리 높이까지 쌓인 참외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많은 참외와 농민의 수를 통해 참외 거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울산의 여름이 키우고 태화강이 품은 참외를 울산, 부산, 대구 사람들이 즐겼다.121) 참외는 수십 대의 트럭에 실려 팔려나갔다. 시세는 한 접에 1원 10전이었다. 다른 지역 참외보다 갑절이나 높았다.122)
울산 참외는 양이 많고 달아서 참외 철에 울산에 발을 디딘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123) 참외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 참외의 맛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참외는 아이들이 간식 이기도 했다.
1936년 달리의 경우 하층에서도 아이들 간식으로 참외 4개, 중층에서도 수박과 참외를 아이들 간식으로 먹고 있다. 이 아이들은 참외를 논에서 씻어 먹었다.124)
참외를 깨끗이 씻어먹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설사를 동반한 복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배탈의 고통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반면 참외 서리의 기억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고장의 여름은 어디를 봐도 산과 논들과 콩밭과 수수밭뿐이었다. 이 산과 논들과 콩밭과 수수밭을 동서로 갈라 남천 강이 허리띠처럼 돌아가고 강기슭으로 띄엄띄엄 원두막이 섰다. 아이들은 강가에서 먹을 감다가도 참외밭을 넘겨다 보면서 몹시 군침도 삼켰다.
원두막 주인에 “돌래 영감”이 있었다. 등 너머 돌래라는 마을에 살기 때문에 돌래 영감이라고 부르는 이 영감은 잔귀가 좀 먹었다. 이 돌래 영감은 역 감는 아이들이 영 질색이었다.
역만 감는 게 아니라 뚝에 올라와서 외순을 다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물장구와 자맥질에 지치면 돌을 뒤져서 게나 징거미를 잡기가 일쑤였고 그도 싫증이 나면 살금살금 원두막 쪽으로 올라갔다.
오영수,「요람기」,『현대문학』1967.10.
오영수의「요람기」속 참외 서리의 추억이다. 이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 언양의 모습이 그려진다. 양명학 울산대 명예교수도 이와 비슷한 기억을 풀어냈다. 이처럼 참외는 유년의 추억이 담긴 과일인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준 그 시절 할배들의 여유가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참외 서리를 하지 말라는 비현실적인 권유보다 참외순만이라도 지키려는 현실적인 선택을한 것이다. 그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서정적인 풍경이다.
이처럼 울산의 참외는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고,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준 고마운 과일이 었다. 울산 참외는 어떻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는가. 울산홍산문화연구소의 정상태 소장은 참외가 사라지는 데는 채 2~3년이 걸리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참외는 공단에서 뿜어내는 연기 때문에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요인과 함께 울산 참외의 재배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새로운 품종 때문이다. 30여 종의 지역별 참외를 일순간에 제압한 참외가 은천참외 이다.
1957년 수입된 은천참외는 노란 색깔의 금싸라기로 알려져 있다. 아삭한 식감에 높은 당도로 우리나라 참외시장에 대변혁을 가져왔다.125) 울산 참외는 이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맥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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