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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음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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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두절 풍습과 음식 이야기

•음력 6월 15일

•대표음식 : 수단, 편주, 기주떡, 상애떡 등

유두는 음력 6월 15일로 한창 무더운 시기입니다. 따라서 더위만큼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절기이며, 이 무렵에 장마가 들기도 합니다. ‘유두’란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의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준말로, 동류수에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이 청(靑), 곧 양기가 가장 왕성하고 맑고 좋은 기운이 많은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면 좋지 않은 기운들을 다 떨쳐 버려 건강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 “경주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액막이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두날 물가를 찾아 몸을 씻고, 풍류를 즐기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해마다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계곡이나 바닷가를 찾아 즐기는 것입니다.

유두절, 물맞이 하는 날
<유두절, 물맞이 하는 날 (한국수자원공사)>

유두 무렵엔 오이, 호박, 감자, 참외, 수박 같은 여름작물을 수확합니다. 그래서 유두에는 여름 농사를 무사히 끝내게 해 준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가을 농사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습니다. 이를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 하는데, ‘천신’이란 새로 난 것을 받들어 올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두천신 때 올리는 음식에 새로 수확한 여름 과일들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6월 유두에 물꼬에 음식을 차려 놓으면 벼멸구가 없어진다.’는 말이 있어 일부 지방에서는 찰떡이나 밀떡을 만들어 논과 밭의 물꼬 밑과 둑 밑에 놓거나 떡을 논가에 떼어 뿌리기도 하고, 꼬쟁이에 끼워 논두렁에 꽂아 두었는데 이를 유두고사 또는 농신제라고 합니다.

보리나 밀이 나는 시기였던 유두에는 별식으로 밀가루 음식이 많았습니다. 이날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먹으면 병 없이 오래 살고 더위도 덜 탄다고 여겼습니다. 또 호박이 제철이라 밀가루에 호박을 채 썰어 넣고 밀전병을 부쳐 먹었습니다.

밀가루에 콩이며 깨를 듬뿍 넣고 꿀물에 버무려 찐 상화떡도 별식이었습니다. 이밖에도 편수나 밀쌈 같은 것도 즐겨 먹었고, 쌀가루를 쪄서 구슬같이 빚어 차가운 꿀물에 넣어서 먹는 수단이나 그냥 먹는 건단도 있었습니다. 수단은 얼음을 넣어 차갑게 먹었는데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얼음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빙고’라는 얼음창고를 두어 궁중과 관료들이 여름철에 사용할 얼음을 관리하였습니다. 얼음은 겨울에 채취하여 창덕궁 안에 있는 내빙고와 4대문 밖에 있는 외빙고에 보관하고 제사 및 관료들에게 나눠주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유두 무렵에는 왕이 관료들에게 얼음표를 나눠 주어 얼음을 가져다 쓰게 했다고 합니다.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렇게 특정계층만 누릴 수 있었던 얼음은 한겨울에 백성들이 채취해 둔 것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제대로 된 외투도 없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지도 못한 채 한강에서 얼음을 깨서 각 빙고까지 어렵게 옮겼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조는 얼음을 채취하는 백성들과 얼음을 나르는 데 쓰이는 배와 말 등에 모두 대가를 지불하라고 했으며, 이 후에는 내빙고는 폐쇄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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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인천광역시 농업기술센터 •인천서구 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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